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라 다카시 (문단 편집) ==== 관료가 되다 ==== 몇 년간의 기자 생활을 마친 하라는 3주 후, 옛 친구의 소개로 [[외무성]] 하급 사무직에 취직, 뒤늦게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외무성에서는 프랑스어 구사자가 부족했기에, 하라는 당시 외무경[* 당시에는 외무성의 수장이 '외무대신'이 아닌 '외무경(卿)'이었다. 메이지 초기의 정치구조인 태정관제에서 비롯된 관직의 이름으로, 메이지 중기 내각제 도입 이후부터 현재의 이름인 외무대신(또는 외무상)으로 바뀌게 된다.]에 재임중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있어서도 귀중한 인재였던 것이다. 같은 해 7월에는, 태정관 문서국 업무를 겸임하며, 정부 기관지인 관보 창설에도 관여하게 된다. 또한 민권파가 우세했던 지방순회직으로 파견 제안을 받게 되어, 같은 해 10월부터는 [[주코쿠]] 지방 및 사이카이도[* 중세~근대(메이지 시대)까지 쓰이던 일본의 지역구분 단위인 [[고키시치도]] 중 하나다. 현재 일본의 [[규슈]] 지역과 그 주변의 부속도서를 이른다.] 시찰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그 해 11월, 프랑스와 [[청나라]] 간의 관계가 악화되자, 정보수집을 위해 하라는 [[톈진]] 총영사로서 중국에 파견된다. 그 때 마침 사츠마 번 출신의 공부성[* 현재의 국토교통성 및 경제산업성에 해당] 대서기관이었던 나카이 히로시(中井弘)의 딸 사다코(貞子)와 결혼하며, 드디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재계를 압도하던 번벌 그룹의 일원에 합류하게 된다. 하라는 27살이 되던 해인 1884년, [[청불전쟁]]에 관한 정보를 정부에 면밀히 보고하여 높은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듬해인 1885년에는 [[갑신정변]]의 영향으로 악화된 청-일관계 수복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와 [[리훙장]]간의 교섭(톈진조약)을 주도했다. 텐진조약의 성공적인 체결의 공을 인정받은 하라는 총리였던 이토에게 높은 외교적 역량을 인정받았으며, 그의 뛰어난 정보수집능력과 분석능력을 각인시키는 성과를 얻는다. 이토의 귀국 후, 하라도 귀국을 명령받아 이번에는 파리 공사관 서기관에 취임을 명받는다. 1년 뒤인 1886년 1월에는 파리로 건너가 대외업무를 보지만, 본인의 어학능력이 아직 부족했다고 생각한 그는 1년간 공부할 기회를 달라며 공무 연기를 요청하였고 얼마 뒤 허락받는다. 그러나 당시 주 프랑스 대사였던 하치스카 모치아키(蜂須賀茂韶)는 프랑스 외에도 4개국의 공사를 겸임하고 있어 대단히 바빴기에, 하라는 공부는 물론, 사무작업과 공사 대리업무로서도 활동해야만 했다. 이듬해, 사무능력이 뛰어났던 다나카 후지마로(田中不二麿) 공사가 취임, 그는 2개국의 업무만을 맡고 있었기에, 하라의 부담은 경감되게 된다. 여유가 생긴 하라는 [[파리정치대학]]의 청강생 신분으로 국제사법을 공부하며, 시간이 될 때마다 일본에 있던 아내 사다코와 여행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1889년 4월, 귀국한 하라는 농상무성(現 [[농림수산성]]과 [[경제산업성]]의 전신) 참사관에 직임한다. 이노우에 가오루 역시 농상무대신이었는데, 이는 외무대신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가 하라에게 앙심을 품은 것을 안 이노우에가 그를 구제하고자 자신의 근무처로 전근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농상무성의 유력한 관료이자 귀족원 의관이었던 마에다 마사나(前田正名)와 대립하여, 생각한대로 잘 풀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에 복수심을 품은 것인지 하라는 차기 농상무대신인 무쓰 무네미쓰의 취임 이후 대신비서관 겸 참사관에 오르자마자 마에다파벌을 대거 일소하기도 한다. 또한 [[도미오카 제사장]] 잉여품 불하 등에도 관여했다. 35살이 되던 해인 1892년, 무쓰의 임기가 끝나자 하라도 이에 따라 퇴직한다.외무성과 농산무성 시절 모두 권력을 이용해 본인의 입지를 유지했던 하라였고, 당시 이토 내각은 정당결성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며, 하라는 자신의 상사였던 무쓰가 그 중심인물이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이토와 마찬가지로 출세와 전도예측에 무척 명석한 사람이었다. 예상대로 그 해 7월, 제2차 이토내각이 출범하였고, 무쓰가 외무대신에 오르자,하라는 외무성 통상국장으로 다시 복귀한다. 하라는 영사재판권의 철폐와 외무성 내부개혁에 힘쓰며, 그 결과 외무성 조직 전반의 개편과 일본의 본격적인 외교관 시험의 도입을 이끌었다. 이 기세를 몰아, 1895년, 그의 나이 39살에 외무성 차관을 직임하였고, 이듬해 1896년 6월에는 무쓰의 사퇴가 결정되자, 주[[조선]]공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오쿠마파벌인 제2차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이 출범하며, 오쿠마가 외무대신에 오르게 되었고, 정치적 노선이 맞지 않다고 생각한 하라는 곧바로 사직서를 내고 일본으로 귀국한다. 또한 11월에는 아내 사다코가 불륜을 저지렀음이 발각되었고, 고향 모리오카에서부터 상경한 어머니와 이후 그의 아내가 되는 스가노 아사(菅野浅)와 동거하게 되었다. 사실 하라는 외무성 차관 시절인 1895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편집장으로 초빙되어, 연봉 5천엔(현재 가치로 한화 약 2억원)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불과 3년 뒤인 1898년 9월[* 그가 귀국 후 관료직을 내려놓은 때였다]에는 사장직에 취임하였으며, 신속성보다는 정확성을 중시한 그의 보도지침에 따라 성장한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은 큰 성공을 거두어, 연 2천만부 정도였던 판매실적이 연 2천9백만부까지 성장, 최종적으로는 약 3배인 6천만부까지 급성장하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도 그는 정계로의 복귀 의지를 거두지 않았기에, 거의 매달마다 도쿄에 올라가 주요 정계인사들과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